Global News

뉴질랜드 장애인 정책 (당사자 참여, 접근성, 예산 권한)

thinkroom 2026. 5. 4. 07:40

솔직히 저는 접근성 문제를 오랫동안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뉴질랜드가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정책을 설계하고 예산까지 집행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그동안 얼마나 무감각했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뉴질랜드 장애인 정책

작은 버튼 하나가 불러온 깨달음

제가 직접 겪어보니, 공공 서비스의 접근성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민원 신청 페이지에서 글씨가 너무 작아 핀치 줌(pinch zoom,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늘려 확대하는 동작)을 반복했던 경험, 모바일 화면 하단에 버튼이 몰려 있어 엄지손가락이 닿지 않았던 순간들. 저야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냥 넘겼지만, 나중에 부모님이 병원 진료 예약 시스템을 쓰다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도 저는 이런 문제가 '장애인을 위한 배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장애 유무나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설계하는 방식입니다. 장애인만을 위한 특별한 조치가 아니라, 처음부터 모두를 염두에 두고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디지털 서비스가 빠르게 늘어나는 지금, 이 개념은 선택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접근성이 처음부터 설계에 반영되지 않으면 나중에 고치는 비용이 훨씬 크다는 것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제가 일한 적 있는 곳에서도 서비스를 출시한 뒤에야 "키보드만으로 사용이 안 된다"는 피드백이 들어와 전면 수정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당사자가 처음부터 참여했다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겁니다.

당사자 참여가 정책 설계에 들어간다면

그때 느낀 건, 정책을 만드는 사람과 정책을 실제로 쓰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뉴질랜드가 2022년에 출범시킨 장애인부(Ministry of Disabled People, Whaikaha)는 그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부처입니다. 장애인부는 기존 보건부나 사회개발부에서 장애 정책을 담당하던 방식과 달리, 장애인 공동체와 협력해 업무 방식 자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출처: 뉴질랜드 장애인부 공식 홈페이지).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부처 명칭입니다. '와이카하(Whaikaha)'는 마오리어로 '스스로 잘 해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손상을 강조하는 기존 마오리어 표현 대신, 장애인 당사자들이 저항하며 직접 선택한 이름입니다. 이름 하나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됐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부처가 올해 3월 발표한 '액세스 액티베이터(Access Activator)' 시범 사업은 그 철학이 더욱 구체화된 형태입니다. 장애인 당사자 단체나 사회적 기업이 접근성 관련 정책을 직접 제안하면, 정부가 예산과 자문을 지원하는 구조입니다. 지원 분야는 아래와 같이 네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 교통
  • 디지털 접근
  • 건축 환경
  • 재난 관리

솔직히 이 부분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정책 관련 공청회나 의견 수렴이 있지만, 대부분 정부가 큰 방향을 정해놓고 의견을 듣는 형태입니다. 반면 액세스 액티베이터는 아이디어 단계에 최대 약 2,100만 원, 검증된 해결 방안에는 최대 약 8,500만 원을 지원합니다. 제안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예산 권한을 갖는 것입니다. 이건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 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에서도 "우리에 관한 것은 우리 없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CRPD란 장애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유엔이 채택한 국제 인권 조약으로, 우리나라도 2009년에 비준했습니다(출처: 유엔 CRPD 공식 페이지). 뉴질랜드 장애인부는 이 원칙을 부처 운영의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데, 액세스 액티베이터는 그것을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도로 구현한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좋은 취지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좋은 제도라도 설계를 잘못하면 의도한 사람에게 닿지 않습니다. 액세스 액티베이터가 '장애인 리더십(disability leadership)'을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은 긍정적입니다. 장애인 리더십이란 당사자가 사업의 기획, 의사결정, 실행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주도권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장애인 구성원을 포함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만 저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제안서 작성, 예산 계획서 제출, 성과 보고 등 행정 역량이 높은 단체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면, 실제로 현장에서 목소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소규모 당사자 단체는 진입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좋은 제도가 조직력 있는 단체의 전유물이 되는 현상, 우리나라에서도 보조금 사업에서 심심찮게 보아온 패턴입니다.

정책의 지속성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범 사업(pilot program)은 말 그대로 본 사업 전에 효과를 검증하는 단계입니다. 시범 사업이 상징적인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선정 과정의 투명성, 성과 평가 기준의 구체성, 그리고 소규모 단체도 참여할 수 있는 행정 지원이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 사업에서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예산 규모가 아니라, 당사자의 경험이 제도 안에서 얼마나 지속적인 권한을 갖게 되는가 하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뉴질랜드의 시도가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자리에 당사자를 앉히려는 방향 자체는, 우리나라 제도가 한번쯤 진지하게 참고해볼 만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접근성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 언젠가는 이 제도의 수혜자이거나 피해자가 됩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공공 서비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조용히 배제하고 있는지, 한번 천천히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참고: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9784